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이우스 마리우스 (문단 편집) === 게르만족과의 싸움 === 마리우스가 5번째 집정관이던 기원전 102년에 드디어 게르만족이 이탈리아로 침략한다. 게르만족은 둘로 나뉘어 남하하였는데 하나는 테우토네스족으로 전사만 해도 12여만이었고 다른 하나는 킴브리족으로 21여만의 전사를 대동하고 있었다.[* 이렇게 엄청난 인원을 보유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이들의 군사행위가 단순한 침공이 아닌 부족 전체의 대규모 이동이었기 때문이다. 침공을 위해 몇몇 인원만 선별해 보내는 것과 아예 부족 전체가 이주를 위해 침공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규모로, 사실상 동원 가능한 모든 인원을 끌어온 것이나 마찬가지며 이런 식이라면 로마인들 역시 백만이 넘는 인원을 군사력으로 동원할 수 있다. 비슷한 경우로 2세기경부터 게르만족이 눈에 띄게 강력해졌음에도 4세기까지는 로마 제국 측이 어찌어찌 막아내는 것이 가능했으나 훈족에 의해 게르만족이 대이동을 시작하자 결국 국경선이 마구 뚫렸던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 실제로 이와 같은 대규모 이주는 언제나 세계사에 큰 영향을 끼치며 일개 유민 집단이 대규모 토착 세력을 여지없이 패배시키는 경우는 세계적으로 자주 보이는 일이다.] 마리우스는 동료 집정관이었던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탈루스와 각각 론 강과 갈리아 키살피나로 향했고 킴브리족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가는 동안 마리우스의 진영으로 테우토네스 족이 진입하였다. 마리우스는 적이 다가왔음에도 나가서 싸울 의지를 보이지 않았고 테우토네스 족은 마리우스의 진영 앞을 지나가며 이탈리아에서 그들의 안부를 전해주겠다며 조롱했다. 테우토네스 족이 아쿠아이 섹스티아이에 이르자 이들을 추격한 마리우스는 높은 언덕에 군대를 주둔시킨 뒤, 기병과 투창병을 내보내 게르만 족을 유인하였다. 로마군을 연달아 쳐부숴 사기가 높았던 게르만 족은 이러한 유인에 걸렸고 언덕을 올라 로마군을 정면으로 공격했던 암브로네스족이 3만의 병력을 잃는 대참패를 당한다. 당황한 암브로네스족과 테우토네스족은 달아나기 시작하였고 마리우스는 이들을 추격하여 10만에 달하는 게르만족을 철저히 쳐부쉈다. 사서에 따르면 게르만족의 전사자는 10만에 이르렀고 마리우스군의 전사자는 1천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승리한 마리우스는 다음 집정관 선거를 위해 로마로 되돌아간다. 한편, 마리우스의 동료 집정관인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기원전 102년 집정관)|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는 킴브리족이 지나오는 알프스 산맥의 고갯길을 방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갯길을 방어하는 게 여의치 않다고 생각한 카툴루스는 포 강으로 철수하여 평원에 진영을 설치했고 이때 알프스를 넘어온 킴브리족이 카툴루스의 진영으로 들이닥치자 카툴루스의 로마군은 진영을 버리고 후퇴하였다. 다음 해인 기원전 101년, 개선식을 준비하다가 카툴루스의 패주 소식을 들은 마리우스는 카툴루스와 합류하기 위해 북이탈리아로 북상한다. 북이탈리아로 진입한 킴브리족은 두 집정관이 이끄는 로마군과 조우하였으나 테우토네스 족의 패배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테우토네스족이 합류하면 전투를 치를 생각이었다. 킴브리족은 마리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테우토네스족과 자신들이 살 땅을 요구하였는데 마리우스는 사슬에 묶인 테우토네스족의 왕을 보여주며,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해주겠다고 조롱하였고 숫적으로 우세한(21만 vs 5만) 킴브리 족의 왕 보이오릭스는 자신만만하게 마리우스에게 회전을 하기 위한 장소와 시간을 정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동안 무기를 개량하고 있던 마리우스는 사흘 뒤인 6월 30일 라우디네 평야에서 맞붙자고 대답하였고 다음 날 아침 마리우스군의 기병은 동이 트자마자 킴브리족의 기병을 공격하였다. 예상보다 이른 공격에 당황한 킴브리 족의 기병은 패주하기 시작한다. 기병이 패주하자 킴브리족의 보병이 나와 응전하였고 마리우스의 로마 군단병이 이들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이미 기병을 패주시킨 로마 기병이 이들을 협공하여 킴브리족은 무너지고 만다. 이때 킴브리족은 14만이 죽고 6만이 포로로 잡혔으며 로마군의 사망자는 1천여에 지나지 않는다고 전해진다. 킴브리족와 테우토네스족은 기원전 113년에 이주를 시작하여 12년에 걸쳐 거침없이 갈리아와 스페인을 휩쓸고 지나갔는데 이탈리아에 진입하여 모두 소멸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들 게르만 족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로마 시민들은 마리우스를 열렬히 환영하였고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다음 해인 기원전 100년 마리우스를 또다시 집정관으로 선출한다. 이는 마리우스에겐 6번째의 영예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